어떤 영화에 대해서는 좀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가령 아직 개봉되기 전의 영화에 대해 최초의 감상을 글로 썼던 사람으로서 막상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제대로 대접받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걸 볼 때도 그런 경우 가운데 하나다. 지난 주(11월 17일) 개봉된 이영미 감독의 <사물의 비밀>의 경우가 그렇다. 5월에 열렸던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이 영화의 첫 시사를 보고 바로 지면에 감상을 올렸고, 글이 실린 온라인 매체 조회수만 보아도 십만 가까운 독자가 글을 읽었으며, 이런저런 국제영화제에 영화가 초청받는 걸 보며 개봉이 되면 글이 아니라 스크린으로 많은 사람과 만나겠구나 싶었더랬다.
개봉을 앞두고 스스로 자신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인심 팍팍한 영화판에서 연출만이 아니라 제작까지 책임져 온 감독은 배급 쪽의 반응이 좋아 백 여 개의 스크린에서 상영하게 되었노라며 기쁘고 감사하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개봉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약속되었던 극장 쪽에서 이미 약속했던 스크린을 거둬들이고, 상영시간도 찾아보기 만만치 않은 시간대에 다른 영화와 말이 좋아 교차요, 바로 말하자면 땜빵으로 밀어 놓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제대로 관객의 평을 받기도 전에 기회조차 빼앗기는 영화가 처음도 아니지만 매번 이런 소식은 참 징하고 힘 빠진다.
한 편의 영화가 스크린에 걸리기까지는 기획, 준비, 제작, 후반까지 참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특히 독립영화의 경우는 자금이 쪼들리다보니 기간이며 품이 더 많이 든다. 그런 영화를 기꺼이 선택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은 감독만이 아니다. 스탭도 그렇고 배우도 그렇다.
<사물의 비밀>에는 특히 영화 ‘타이틀 롤’을 맡은 주연이 아니라 이름도 없이 ‘횟집녀’라 불리는 배우가 영화에 쏟은 최선이 이미 개봉 전부터 주목을 받을 정도로 대단했다. ‘윤다경’이 바로 그 관심의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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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물의 비밀' 포스터. | ||
윤다경은 영화에서 과감한 노출 연기를 했지만 그래서 화제가 되는 것은 식상하다. 오히려 겨우 4회차 촬영에 영화 전반에 걸쳐 주인공의 의식과 억압과 욕망을 꿰뚫으면서 스타급 주인공보다 더 깊고 진하게 작품에 자신의 존재감을 스크린에 새기고, 영화제부터 시사회 기간 내내 언론과 관객에게 ‘저 배우 누구지? 최고야!’라는 찬사를 받는다는 것이 새롭다. 주연보다 더 주목을 받는 조연을 ‘씬 스틸러’라고 한다면 윤다경은 한국 영화에서 드물게 떠오른 여성 ‘씬 스틸러’라고 할 만하다. 그래서 만나봤다.
이안 : 영화 <사물의 비밀> 횟집녀 역할로 영화제에서부터 내내 많은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중요한 조연이라기보다 영화를 사실상 이끌어가는 핵심 인물로 확실한 존재감을 보였고, 그걸 언론과 관객이 알아주고 있습니다.
윤다경 : 일단 참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한 연기를 알아주고, 그래서 영화가 관객에게 선택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개봉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막상 개봉을 앞두고 갑자기 관행이라기에는 참 일방적인 배급문제로 약속되었던 상영관이 일방적으로 취소되는 상황이 안타깝습니다. 작품에 진정을 담아 참여한 연기자로서도 그렇고, 몇 년 동안 영화를 완성하기 위한 감독 입장에서도 그렇고, 관객과의 소통이 정당하게 열리기를 바랍니다. 영화에 대한 평가가 배급을 독점한 자본에 의해서가 아니라 관객의 평가를 통해 이루어지고, 부족하다는 질책도 관객으로부터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물의 비밀>같은 저예산 독립영화들이 영화제에서 아무리 인정받아도 배급에서 막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은 작품성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이 새삼 답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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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물의 비밀'의 배우 윤다경.
이치열 기자 truth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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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다경 : <사물의 비밀> 제작여건이 어렵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연기자로서는 시나리오와 감독에 대한 신뢰가 작품선택에서는 가장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기존 상업영화에서 감독의 의도가 제작과정에서 자본의 요구에 따르느라 훼손되는 경우를 많이 봤는데, 독립제작의 경우 감독이 처음의 의도를 끝까지 관철시키면서 <사물의 비밀>에 등장하는 인물을 통해 얘기하려는 소통, 사랑, 유머, 용기와 같은 울림을 작품에 담아내리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관객의 수준이 높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에 기회만 공정하게 주어진다면 얄팍한 흥행코드나 스타에 의존하는 티켓 파워에 흔들리지 않고 영화의 완성도를 봐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름조차 없는 '횟집녀'의 주체적인 사랑에 공감"
이안 : 그런 믿음을 바탕으로 출연을 결정하기에는 상당히 파격적인 노출과 과감한 에로티시즘을 연기하셔야 했는데요?
윤다경 : 저 윤다경은 연기자로서든 자연인으로서든 사회적, 문화적으로는 영화의 주인공인 여교수 혜정과 크게 다르지 않은 중류층의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작품 속에서 그런 엘리트를 통해서가 아니라 복사기나 카메라 같은 사물, 또는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 ‘횟집녀’ 등을 통해 주체로서의 존재가 진솔한 목소리를 낸다는 시나리오를 보고 스스로를 되돌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름을 내세우는 몇몇 엘리트보다 삶을 직접 겪어내는 이름없는 대중이 삶에서 더 당당하고 의연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시나리오에 공감했기에 영화 속에서 횟집녀가 욕망을 표출하고 실현하는 것이 자신과 상대가 존재를 걸고 소통하고 대화하는 아름답고 주체적인 사랑이라고 생각했기에 꺼릴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안 : 작품 속에서는 주인공의 논문 자료 수집을 위한 인터뷰 장면에서 등장하는데, 그 장면에서는 이미 ‘횟집녀’는 모든 일을 겪은 다음입니다. 그런데 인터뷰를 하는 시점에서 횟집녀가 사랑의 상대였던 젊은 남자와 어떤 상태, 어떤 관계인지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윤다경씨의 연기가 하도 단호해서인지 인터뷰를 하는 영화 속 혜정도, 영화를 보는 관객도 그걸 캐묻지 않습니다.
윤다경 : 그 장면이 이 영화에서 처음 찍은 장면입니다. 이미 모든 일을 겪고 나서의 상황을 첫 장면으로 연기하면서 ‘횟집녀’처럼 억압, 갈등, 고통, 자각과 같은 온갖 과정을 겪어낸 사람은 이미 스스로 자각하고 주체적 실존을 확립했기 때문에 모든 집착과 타성을 버린 모습으로 보이기를 바랐습니다. 누구와 함께 하는가를 남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으로 보이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고, 앞으로 어떻게 살 사람으로 보이는 가가 더 중요했습니다.
"대학 때 배운 판소리 스승의 사랑과 인생에서 영감"
이안 : 그런 생각은 그냥 연기 뿐 아니라 배우가 배역에 불어넣는 의식도 작용할 텐데, 바탕이 된 경험이나 철학이 있으신가요?
윤다경 : 대학 때 연극을 하면서 판소리를 배운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드라마에 대한 이론을 넘어서는 실제 연희와 판소리가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화술을 배우려고 가르침을 청한 스승께 인생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판소리 선생님께서 가야금을 배우신 적이 있는데 가야금 스승도 제 판소리 선생님도 각자 배우자가 있는 상태였으나 서로 사랑하게 되면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고, 그러다 가야금 스승과 사별하시고서는 당시에 다른 분과 함께 하고 계신 상태이셨습니다. 그 분의 가르침을 받으며 지금 누군가와 살고 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나로서 살아갈 수 있는 당당함이 사람을 아름답게 보이도록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고수 등 상대역의 배려가 과감한 연기 이끌어내"
이안 : 첫 영화 출연작품인 <밀애>도 그렇고, 미남배우 고수의 상대로 출연했던 <백야행>도 그렇고, 이번 <사물의 비밀>도 그렇고, 지금까지 주연이 아니면서도 상당히 강도 높은 에로티시즘을 연기하는 배역을 맡으셨습니다. 더구나 실제 자신의 외모보다 훨씬 수수하거나 볼품없는 분장을 하고서요.
윤다경 : 저는 그저 그림같은 외모의 아름다움보다는 온몸으로 삶을 살고, 존재로 겪어내면서 불꽃같은 에너지를 뿜어내는 인물에 매료되곤 합니다. 그런 생동하는 배역을 맡아 연기하다보면 잘 차려입거나 꾸미고 등장할 일이 거의 없었네요. 가령 가장 잘 차려입어본 적이래야 연극에서 마담 역이나 수녀 역 정도? <밀애>에서도 그렇고 <사물의 비밀>에서도 그렇고 화초같은 꽃이기보다 들꽃같고 나무같은 모습을 보이고 싶었습니다. 이런 연기가 혼자 마음먹고 계산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고, 상대역을 맡은 배우와 만날 때 또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더군요. 가령 <백야행>에서 고수씨의 배려가 남들 보기에 과감한 연기를 부담없이 할 수 있게 해주었고, 이번 <사물의 비밀>에서도 남편 역의 배우가 어찌나 선량함 그 자체로 보이던지 죄책감에도 불구하고 욕망을 억누를 수 없는 횟집녀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내 주셨습니다.
이안 : 연극으로는 이미 탄탄한 신뢰를 받은 연기자지만 영화에서는 아직 낯선 이름의 배우인데 몇몇 영화를 겪으시면서 느끼신 바가 있으실 텐데요.
윤다경 : 한국영화는 외형적으로 보자면 문화예술 가운데 참 놀랍도록 발전한 분야입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상업주의적 발전에 치우치다보니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시나리오가 처음 기획될 때 담고있었던 창작자의 최초 의도보다 다른 목적이 더 중요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더군요. 배우를 캐스팅할 때 역할에 대한 장인 정신을 가진 연기자가 아니라 노출 여부를 따지거나 광고 파급효과 때문에 자신의 이미지만 신경쓰는 연예인보다는 작품을 본질적으로 함께 고민하는 배우를 찾고, 또 연기자에게 작품을 통해 본질적으로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고민하도록 하는 제작 환경이 되었으면 합니다. 감독이든 작가든 배우든 인생을 걸고 준비하는 작품인데 다른 것들과 타협하도록 몰아가는 제작구조가 바로 잡히지 않는다면 지금 아무리 영화계에 훌륭한 인재가 많다고 해도 미래는 암울할 수 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영화계의 인력을 보면 공급이 수요보다 많은 형편이니 타협이 구조화되면 창작자의 정신은 바로 서기 힘들어집니다.
"감독 배우 스태프 인생 걸고 하는 영화, 타협 강요해서야"
영화 '사물의 비밀'의 배우 윤다경.
이안 : <사물의 비밀>은 윤다경씨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많은 상영관에서 관객과 만나기에는 이미 배급의 힘에 밀려 작은 규모로 관객과 만날 듯합니다. 마음이 착잡하시겠어요.
윤다경 : <사물의 비밀>은 진심을 담은 작지만 스스로 빛을 발하는 강한 불빛과도 같은 작품입니다. 외부에서 비치는 조명이 아무리 화려하다해도 꺼지면 그뿐이지만 자신이 품은 빛은 아무리 작아도 계속 빛을 냅니다. 그 작은 빛이 관객과 만나 소통하면서 울림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앞으로도 사회적으로는 약자지만 내면의 힘은 강인한 인물들을 작품을 통해 만나고 연기하고 싶습니다. 그런 역할들을 통해 서로 공감하고, 힘이 되고, 소통하는 인간 윤다경으로 살고 싶습니다. 관객들이 이번 작품에서도 그런 울림에 화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