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기난사범은 '미친놈'이 아닙니다
총기난사범은 '미친놈'이 아닙니다
[이안의 컬처필터] 총 권하는 사회가 빚어낸 참극 '볼링 포 콜럼바인'

 2011년 7월 22일, 밝은 대낮에 노르웨이 오슬로의 행정부 건물과 총리 집무실 외곽, 기타 정부 건물에서 사람 여럿 죽고 상하는 폭발 테러가 일어난 지 겨우 2시간 남짓 뒤에 우퇴위아 섬의 노동당 청소년캠프 행사장에서 경찰복을 입은 청년이 캠프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총질을 해대 모두 76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이는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 라는 청년이었다. 브레이비크는 알고 보니 인터넷에서 반 다문화주의 활동을 하면서 대한민국과 일본, 중화민국을 다문화주의에 부정적인 나라라서 찬양하면서 아소 다로 전 일본 총리와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고 싶어 했던 인물이었다. 

뻔뻔하고 소름끼치는 살인 참극을 벌인 이가 단지 남다른 괴물이라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 아니다. 폭탄을 터뜨리고 방아쇠를 당기고도 멀쩡한 표정으로 자기 소신을 밝히는 청년과 그가 저지른 짓은 극우 이데올로기에 물들어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키는 총기난사 사건을 저지른 이들의 배후에는 어떤 일관된 배경이 있다는 것을 짚어보도록 한다. 그런 사건 가운데 하나가 예전에 미국에서 벌어진 콜럼바인 고등학교 총기난사 사건이었다. 

총기난사 사건 배후의 어떤 공통점

   
영화 '볼링 포 컬럼바인'
 
1999년, 세기말이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나 종말론자들의 경고가 무색하게 세상은 멸망하지 않았고, 신은 재림하지 않았다. 이런 세상의 여전함이 다행스러웠던 것일까, 무시무시했던 것일까? 그런데, 너무도 평화롭고 아름답던 99년의 가을 하늘 아래로 우리를 다시 데려간다면, 거기서 이미 세상은 파국으로 치달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해, 미국에서만 여덟 차례의 총기 사고가 학교 안에서 일어났다. 그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벌어졌다. 두 명의 학생이 학교 안에서 총을 휘둘러 13명이 죽고, 23명이 다쳤다. 그리고 그 두 학생은 자살했다. 겨우 16분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학교 안에 설치된 폐쇄회로(CC)TV 덕분에 전세계가 그 참극을 생생하게 보았지만, 아무도 어째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마이클 무어 감독은 <볼링 포 콜럼바인>(2003년)에서 그 답을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이미 죽어버린 아이들로부터는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 없는데, 피의 흔적과 총알 자국을 따라가서 마이클 무어가 도달한 결론은 ‘총 권하는 사회’였다. 끊임없이 타자를 만들어내고, 적을 만들어내고, 공포를 만들어내는 군산(軍産)복합체 국가 자체의 불안.

모든 것을 사회로 환원시키는 <볼링 포 콜럼바인>의 인터뷰들에서 도드라지는 목소리가 하나 있다. 총을 쥐었던 아이들이 즐겨 듣던 음악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엉뚱하게 책임을 뒤집어 쓴 뮤지션 마릴린 맨슨을 찾아간 마이클 무어는 만약 그 아이들이 살아있다면 무슨 말을 해주고 싶냐고 묻는다. 그 물음에 마릴린 맨슨은 대답한다. 무슨 말을 묻기보다 그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다고.

책임 뒤집어 쓴 뮤지션 마릴린 맨슨 "아이들 이야기 들어주고 싶다"

거스 반 산트 감독의 <엘리펀트>(2003년)는 이 지점에 서있는 영화다. ‘만약에’의 순간으로 돌아가 아이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댄다. 그런데 정작 아이들은 아무 말도 들려주지 않는다. 곧 벌어질 사건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학교는 너무도 고요하고 평화로워서 오히려 불온해 보인다.
 
그런데 막상 아이들의 시간과 행적을 집요하게 앞뒤로 따라다니는 카메라는 대답을 갈구하는 관객의 욕구를 무시하고 오직 지켜볼 것을 명령한다. 영화는 서사를 만들어내는 대신 풍경을 만들어내고, 결론을 이끌어내는 대신 상황에의 이입을 요구한다. 사실, 이미 모든 일은 벌어진 다음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영화 '엘리펀트' 포스터
 
거실 안에 있는 코끼리를 밖으로 내보낼 수 없다는 딜레마나 장님이 손으로 일부를 만져본 것만으로는 도저히 그 실체를 그려낼 수 없다는 커다란 코끼리의 우화처럼, 영화의 힘을 빌려 그 시점으로 돌아간다 한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런 설명도 할 수 없다.

<엘리펀트>는 총기사건을 주인공으로 삼지 않는다. 대신 아이들의 이름을 부른다. 그때 학교에 있었던 존, 일라이, 네이던, 미셸, 브리태니, 베니…그리고 총을 잡았던 알렉스와 에릭. 호명되는 순간, 다른 아이들의 시간에는 스쳐 지나가는 배경에 지나지 않았던 하나하나가 자신의 시간에서 중심이 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실화가 아니라 재구성된 풍경이다. 여전히 코끼리는 불가해한 상태로 남아있다. 학교도, 세상도 달라진 게 없다. 세기말의 파국이 오래오래 지속되는 동안 아이들은 어른이 되고, 다시 아이들을 낳을 것이다. 

사회의 문제 개인 탓으로 돌린다면 언제고 되풀이될 비극 

그렇게 세상을 불가해한 상태로 내버려둔다면 이런 사건은 언제 어디서고 되풀이 될 수 있다. 통제와 규율이 깐깐하기로 이름 높던 해병대에서 한 병사가 ‘전우’라는 끈끈한 이름으로 불러야할 동료 병사들에게 총을 겨누었던 사건도 짚어보면 그 병사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을 옥죄는 세상의 잘못 때문이었다.

우리가 사는 나라가 테러범이 찬양하는 나라이고, 그 테러범이 만나보고 싶어 하던 이가 이 나라 대통령이라는 것이 부끄럽다면 먼저 우리 자신부터 바뀌어야 한다. 그릇된 군대 문화, 뒤틀린 권위주의를 바로 잡지 않으면 이 나라는 늘 ‘총 권하는 사회’로 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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