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는 다양한 영화들에 대한 젊은 영화학도의 시선을 통해 자주 접할 수 없는 필리핀 독립영화를 소개한다. 헐리우드 상업영화나 유럽 아트하우스 영화 뿐 아니라 영화의 세계는 넓고도 깊다. 그 안에서 공감할 수 있는 영화를 찾는 것, 그 영화들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나를 돌아보는 것, 그것이 진정한 교류이고 세계화일 것이다. /이안 영화평론가
라야 마틴, 라브 디아즈, 쉐라드 안토니 산체스, 존 토레스…. 동시대 국제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필리핀 독립영화 감독들의 이름이다. 그리고 여기, 필리핀 독립영화의 대부라고 불리는 키들랏 타히믹이 있다. 키들랏 타히믹은 <향기어린 악몽>으로 1977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화려하게 데뷔하였다. 출품 기한을 넘겨 어쩌면 그 해 상영되지도 못할 뻔 했던 <향기로운 악몽>은, 영화제에서 상영되자마자 즉각적으로 관객의 호응과 비판적 찬사를 동시에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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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향기어린 악몽' | ||
<향기어린 악몽>의 이야기를 정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할리우드의 지배적인 내러티브 서술 규범을 따르지 않고 키들랏의 내면을 서술하는 비선형적인 구조로 영화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키들랏(키들랏 타히믹은 그의 데뷔작에서 스스로 주연을 맡아 ‘키들랏 타히믹’을 연기한다)은 필리핀에서 지프니 기사를 하며 살아가고 있다. 키들랏은 독일이 패전한 후 미국으로 가, 미국항공우주국에 소속되어 아폴로 계획을 위시한 우주개발계획에 중요한 역할을 한 독일 출신 로켓 연구가인 베르너 폰 브라운을 동경하며, 그의 팬클럽 회장 역할을 자처한다. 키들랏의 미국인 친구이자 보스는 키들랏에게 묻는다. “키들랏, 왜 그렇게 미국이 좋아?” 키들랏은 “나는 필리핀에서 택시 운전을 하는데, 미국에서는 누구나 우주비행사가 될 수 있다.”면서 필리핀을 벗어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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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향기어린 악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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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향기어린 악몽' | ||
<향기어린 악몽>의 대부분은 연출에 의한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감독 본인이 ‘실제로’ 겪은 일들을 카메라로 찍고 조각들을 모아 편집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 몇몇 부분은 감독 키들랏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영상 에세이에 가깝다. 그 이유는 <향기어린 악몽>이 그의 일상생활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키들랏은 “예술은 절대 우리의 일상과 떨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에피소드를 모아 한 편의 영화를 완성하는 방식은 결과물을 픽션과 에세이 영화의 경계에 위치시킨다. 실제로 <향기어린 악몽>은 키들랏 타히믹이 1975~77년 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볼렉스 카메라(초창기 텔레비전 뉴스, 자연 다큐멘터리, 아방가르드 작품들에 쓰였으며, 최근에는 에니메이터들이 즐겨 사용하는 16mm 카메라)로 찍어 편집한 것이다.
여기서 파리의 거리 산보자 발터 벤야민을 연상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다. 벤야민과 키들랏 모두 파리(키들랏의 경우는 뮌헨까지)라는 대도시의 이미지들로 그들 각자의 에세이를 구상한다. 벤야민은 『일방통행로』에서 보여준 것처럼 문학적인 몽타주 서술 기법을 통해 자본주의 상품사회가 제공하는 판타스마고리아, 상품의 물신적 마력에서 깨어나기를 요구한다. 키들랏 역시 자신이 대도시에서 겪은 일상의 순간들에 천착하여 자본주의 상품물신이라는 꿈을 비판한다.
<향기어린 악몽>은 3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도 사회비판적 힘을 잃지 않는,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세계와 전 지구를 지배하는 논리에 대한 강력하고도 현실적인 은유이다. 이것이 키들랏 타히믹이 (미학적, 정치적으로 가장 멀리 나아갔다고 알려져 있는) 필리핀 독립영화의 ‘대부’라고 불리는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