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한 탈레반이 여성과 언론인의 인권을 존중하겠다고 공언했으나 기자의 가족을 총살하거나 가택에 급습하고 여성 언론인 출근을 금지하는 등 탄압 사례가 끊이지 않고 있다. 한편 미군에 의한 아프간 전쟁 피해를 조명하지 않는 미 주류 언론에 대한 아프간 언론인의 비판도 나왔다.
외신과 국제 비영리 언론단체 언론인보호위원회 입장을 종합하면 탈레반 군은 지난 15일 아프간을 점령한 이래 4일간 최소 4명에 달하는 언론인의 자택을 급습했다. 일례로 탈레반은 지난 19일 독일 공영방송 도이치벨레(DW) 소속 한 에디터의 집에 급습한 뒤 그를 발견하지 못하자 친인척 1명을 총살하고 다른 1명엔 중상을 입혔다. 탈레반은 그 외 DW 에디터 2명의 집도 급습했다. 해당 에디터는 현재 독일로 대피한 상태다.
DW의 페터 림버그 국장은 입장문에서 “독일 정부가 아프간에서 서방의 매체들과 협업한 아프간인들을 돕기 위해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프간 주재 해외 매체와 일한 아프간 국적의 언론인이 탈레반에 타깃이 되고 있는 현실을 외면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탈레반은 점령 당일인 15일엔 아프간의 공영방송 ‘RTA’의 여성 언론인 2명의 출근을 금지했다. 이들은 이날 RTA 방송사에 들어서려는 앵커 카디자 아민과 샤브남 다우란 앵커의 출입을 금지하는 반면 다른 남성 직원들에게는 출입을 허용했다. 탈레반이 임명한 뉴스 진행자가 이들을 대신해 탈레반 지도부의 성명을 전달했다. 이들은 며칠 뒤 복귀를 시도했으나 탈레반 측이 ‘복귀를 명할 때까지 집에 있으라’고 했다.
탈레반은 지난 19일엔 시위대에 발포하고 기자들을 구타했다. 탈레반은 이날 아프간 잘랄라바드에서 거리를 행진한 수백명의 시위대에 발포해 2명이 숨지고 12명이 부상을 당했다. 탈레반은 현장에서 취재하던 민영통신사인 ‘파즈옥 아프간 뉴스’의 영상기자와 ‘아리아나뉴스’의 카메라 오퍼레이터를 소총 등으로 바닥에 제압한 뒤 온몸을 구타했다고 두 기자가 언론인보호위를 통해 밝혔다.

탈레반이 지난 17일 아프간을 장악한 뒤 첫 기자회견에서 여성의 권리와 언론의 활동을 존중하겠다고 밝힌 것과 상충하는 모습이다.
탈레반 대변인인 자비훌라 무자히드는 카불에서 진행된 이 기자회견에서 “탈레반은 변했고 과거와 같은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며 “언론이 독립적으로 유지하기를 바란다"고 밝히면서도 "국가의 가치에 반해 작동해선 안 된다”고 했다. 여성 인권에 대해선 “이슬람 율법 아래 여성이 일하도록 허용할 의지가 있다”고 했다. 이들은 “우리는 개인의 집에 찾아가 어느 편을 도왔는지 묻지 않을 것”이라며 보복 금지도 약속했다.
언론인보호위는 19일(현지시간) 입장문을 내 “탈레반은 즉각 언론인에 대한 괴롭힘과 공격을 멈추고, 여성 언론인이 뉴스를 방송하도록 하며, 미디어가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운영되도록 허용해야 한다”고 밝혔다.
국경없는기자회는 21일 입장을 내 “미국 정부는 군 철수 완료 시점을 미루고 위험에 처한 아프간 언론인과 인권 옹호 활동가들을 도피시켜야 한다”며 “미국 정부가 기존에 밝힌 군 철수 기한인 8월31일까지 언론인을 비롯해 위험에 빠진 아프간인들을 대피시키기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했다.

“미국 책임 지우는 서구언론의 ‘화이트워싱’”
한편 서구 언론이 최근 아프간 점령 상황에 단순한 보도 논조를 보이며 미국의 아프간 전쟁 중 자행한 학살에 대한 책임은 지우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오스트리아-아프간 국적의 엠란 페로즈 기자는 아메리칸프로스펙트지에 쓴 칼럼 “아프간 전쟁의 화이트워싱”에서 “많은 서구 언론인들은 가능한 한 많은 콘텐츠를 신속하게 생산하려 이 나라로 서둘러 오고 있다”며 “이들은 현지 언어에 지식이 부족하고 지역 관습과 문화에 지독하게 무지하며, 이 나라와 이를 둘러싼 지정학에 서툴다. 게으르게도 오랜 인종주의·오리엘탈리즘적 수사에 새 숨을 불어넣고 있다”고 했다.
그는 “너무 많은 서구 언론인과 분석가가 미국이 침략한 나라의 사람들을 경멸하고 무신경하다”며 “탈레반이나 ISIS 또는 포괄적인 개념인 ‘테러리스트’와 같은 ‘타자’의 폭력에만 초점을 맞추고 서구 점령으로 인한 유혈 사태와 폭력은 외면한다”고 했다.

이 기자는 미국이 아프간 바그람 등 지역에 군사시설 ‘블랙 사이트’를 세우고 아프간 민간인을 납치·감금·고문해 살해해온 사실이나 미군이 칸다하르 지역에서 여성·어린이를 포함해 17명의 민간인을 살해하는 등 다수의 민간인 학살을 벌이고도 제대로 사건을 규명하지 않은 점을 언급한 뒤 서구 언론이 최근 해당 지역을 다루면서도 이들 사건은 거론하지 않는다고 했다.
미군이 프레데터 등 공격용 드론을 동원해 마을을 폭격하며 수천 명을 살해했지만 탈레반 설립자인 물라 모하마드 오마르는 미군 공군 기지 근처에 살다 자연사하고 오사마 빈 라덴은 아프가니스탄에 없었다는 점도 지적했다. 그는 “현재 진행되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보도는 2000년대 초반 극도로 단순한 보도들의 데자뷰”라며 “20년의 실패 뒤에도 많은 서구의 관조자들은 비눗방울 안에 살길 바라고 있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