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시간 60시간 70시간 80시간 뺑이 쳤지
때로는 형님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하자기에
아침부터 새벽까지 몸 버리고 속 버리고 일했는데
이제 와서 필요 없다 이제 와서 나가라니 웬 말이냐
이씨 니가 시키는 대로 내가 당할 줄 아나
이씨 니가 시키는 대로 내가 당할 줄 아나
니 맘대로 다 시키고 니 맘대로 일 끝내도 참았는데
월급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다져가며 버텼는데
회사 사정 어렵다고 임금체불 밥 먹듯이 해대더니
지 살돈 챙겨 갖고 도망치고 어딜 갔냐 씨발놈아”
가수 연영석 <이씨 니가 시키는 대로 내가 다 할 줄 아나>
지난 17일 저녁 홍대 인디프레소 무대에 가수 연영석씨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의 노래 ‘이씨 니가 시키는 대로 내가 다 할 줄 아나’에 나오는 가사처럼 ‘회사 사정 어렵다고 임금체불 밥 먹듯’ 겪은 예술인들은 이날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예술인들의 노동조합인 예술인소셜유니온이 17일 준비위원회를 발족했다. 지난해 12월 초동모임을 가진 후 10개월 만이다. 예술인소셜유니온은 스스로 예술가, 예술노동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는 모든 사람을 가입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날 발족식에서는 ‘누가 누가 더 당했나’ 수다회가 열렸다. 예술인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자리였다. 만화가·극작가·음악인·보조출연자 치고 돈을 떼여보지 않은 예술인은 없었다.
음악인 정문식(밴드 더문)씨는 “영화나 드라마는 음악감독 선배들이 스태프 등을 친다”며 “어시스턴트들이 쓴 곡을 자기 이름으로 바꾸면서 ‘보통 나도 그랬어’라고 한다. 그것을 거부하면 업계에서 매장당한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젊은 친구들은 많이 달라졌다. 상식적이지 않은 것에 대해 분개하고 비합리적이라고 얘기하는데도 구조 자체가 어쩔 수 없다”며 “자기가 음악감독이 됐을 때 그런 식으로 돌아간다. 마치 시어머니가 며느리 구박했던 것을 며느리가 반복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했다.
“저희는 통장에 돈이 찍혀야 일이 끝나는 것입니다. 영화 음악 스태프로 일했을 때 소송까지 가겠다고 해서 돈을 받은 경우도 있고요. 가장 큰 문제는 ‘너희는 하고 싶은 것 하는 것 아니냐. 좀 굶어도 돼. 네가 선택한 길이잖아. 예술가는 가난한 거 아냐?’라는 인식이죠.”
그는 “가난한 예술가 당신이 해 보시라고 얘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만화가 김재수씨는 1년 전 세 군데에서 동시에 일을 받았다가, 세 곳에서 모두 돈을 떼인 경험을 소개했다. 각각 30만 원, 70만 원, 150만 원을 받기로 한 일이었다. 30만 원짜리 작업과 70만 원짜리 작업은 모두 10개월 째에 ‘갑’이 도망쳤고, 150만 원은 떼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사회적 기업에게 떼였다.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떡 사먹은 셈 치라"고 했지만 그는 "세상에 30만 원짜리 떡이 어딨냐"고 반문했다.
"방과 후 교육으로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어떻게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아이들에게 돈 떼인 얘기를 할수도 없잖아요. 후배들은 이런 일 안 당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밥 먹고 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수다회 사회자 민정연 예술인소셜유니온 준비위 공동위원장(문화기획자·꽃다지)은 예술인소셜유니온을 준비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이 “떼인 돈 받아줍니까”라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극작가 박새봄(인당수사랑가)씨는 “공연은 처음부터 자기 주머니에서 하는 사업이 아니라 투자자가 따로 있다”며 “제작자들이 ‘예술노동자에게 반드시 돈을 줘야 하는 건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쉽게 일을 시작하는 경우가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제작할 능력이 안 되지만 무책임하게 작품을 시작하는 제작자가 많다는 것이다. 저작권법을 거의 다 외운다는 그는 “누가 해주지 않으니까 계약서 조항마다 불리한지, 독소조항인지 싸워야 한다”며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도 있는데 개개인에게 맡기는 것은 문제”라고 말했다.
앞서 7년 전 전국보조출연자노동조합을 세운 문계순 위원장은 25년 동안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다가 보조출연자 일을 시작하고 노조까지 세우게 된 계기를 소개했다. 자녀들을 키운 후 50세가 넘어 ‘엑스트라 모집’ 지역광고를 보고 보조출연자가 됐다는 그는 첫 작품으로 드라마 <서울 1945> 촬영을 갔다가 꼬박 72시간 동안 일을 했다.
노동시간보다 더 놀란 것은 용역회사 진행반장들이 언어폭행이었다. 그는 “공영방송 드라마를 찍는데 작업반장들이 보조출연자들을 완전히 포로 수용소 죄인 취급하더라”며 당시 상황을 전했다.
“70년대 모방회사에서 노조 활동을 했었어요. 그 때 처음 노조를 알았는데 25년 동안 살림하고 나왔을 때는 환경이 잘 돼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무식한 게 용감하다고 얼마나 수심이 깊은지도 모르고 이 세계에 발을 들여 놓았지요.”

문 위원장은 보조출연자가 된 지 2개월 만에 노조를 만들었다. 처음 설립 신고를 할 때 ‘개인사업자’로 돼 있다는 이유로 서울시청에서 2시간 동안 설립신고 접수를 받아주지 않아 실랑이를 벌인 일, 노조 설립 필증이 나온 뒤에도 용역회사들이 교섭에 나서지 않아 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을 한 일,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재 승인을 받기까지의 투쟁, 드라마 제작사에게 돈을 못 받은 용역회사를 대신해 돈을 받아준 경험까지 다양한 에피소드가 줄줄이 이어졌다.
민정연 위원장은 “우리 사회 전반에 예술에 대한 노동으로서의 인식 자체가 거의 없다”며 “이런 인식을 바꿔나가는 것이 예술인소셜유니온이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유니온 설립 배경에 대해 “많은 장르에서 자기의 노동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창작에서 손을 놓는 예술가들을 많이 본다”며 “당사자로서 더 이상 참는 것이 아니라 이제 뭔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을 했다”고 강조했다.
나도원 예술인소셜유니온 준비위 공동위원장(음악평론가·진보신당 문화예술위원장)은 “많은 예술인들이 숨졌다.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겠지만 없었다”며 “여러분이 지푸라기가 되고 동아줄이 돼 달라”고 말했다. 참가자들은 서로의 손바닥을 마주치며 ‘하이파이브’를 하는 것으로 준비위 발족을 선언했다.
예술인소셜유니온 준비 주체들은 지난해 12월 ‘밥 먹고 예술합시다’ 집담회를 시작으로 올해 2월 공개 간담회, 3월 공개 워크숍 ‘예술인소셜유니온 무엇을 할 것인가’, 9월 ‘108분 토론회’ 등을 진행했다.
예술인소셜유니온은 예술의 사회적 노동 관련 커뮤니티 구축과 연대, 문화예술 분야 노동 현안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 문화자본의 독점에 저항하는 것 등을 주요 사업으로 구상하고 있다. 당장은 다음달부터 시행되는 예술인복지법을 개정하는 데 힘을 쏟고, 내년 상반기 설립신고도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