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에서 발생한 극우 민족주의자의 폭탄테러로 100여 명 가까운 희생자가 발생해 전세계에 충격을 던져주고 있는 가운데, 사건 초기 서구 언론들이 섣불리 알카에다 등 ‘이슬람 테러리스트’를 범인으로 지목한 것에 대해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가디언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찰리 브루커는 24일(현지시각) 가디언에 기고한 글(바로가기)에서 방송에 등장하는 ‘전문가(expert)’를 ‘추측하는 사람(Guesser)’으로, ‘추론(speculation)’을 ‘추측(guess)’으로 바꿔야 한다고 꼬집었다. 이는 사건 초기에 언론들이 전문가들을 동원해 아무런 근거 없이 ‘이슬람 근본주의자’를 범인으로 지목했을 뿐만 아니라, 범인이 백인 극우 민족주의자로 밝혀진 이후에도 언론이 여전히 무슬림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 |
||
▲ 영국 대중지 '더 선(The Sun)'의 7월 23일자 1면. 알카에다의 대량학살'이라는 구절과 '노르웨이의 9/11'이라는 표현이 눈에 들어온다. | ||
브루커 씨는 “금요일 밤 뉴스에서 셀 수 없는 ‘안보 전문가’들이 출연해 범인이 알카에다와 연결되어 있는 테러 조직의 일원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면서 “폭발 이후 ‘전문가’들은 ‘왜 무슬림들이 노르웨이를 증오하는지’에 대해 갖가지 이유를 늘어놓기 시작했다”고 자신의 목격담을 전했다.
그에 따르면 언론과 ‘전문가’들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노르웨이가 수행한 역할 때문에, 최근 노르웨이 정부가 이슬람 성직자를 기소했기 때문에, 최근 노르웨이의 한 신문사가 마호메트 비하 논란을 빚었던 덴마크의 풍자 만화를 다시 게재했기 때문에, 미국이나 영국에 비해 ‘쉬운 타겟(soft-target)’이었기 때문에” 이슬람 근본주의자를 범인으로 지목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알자지라 방송의 홈페이지에는 무슬림을 범인으로 지목하는 언론의 보도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한 사용자는 “(언론의 보도 태도는) 편협하고 광신적인 믿음이 주류 언론을 장악하고 있음이 드러난 것”이라고 지적했다. 뉴욕타임스는 자사 홈페이지 오피니언 코너에서 이번 사건을 ‘문명의 충돌’이라고 명명하는가 하면, 워싱턴 포스트는 “이번 공격은 이슬람 테러리즘의 결과”라는 ‘전문가’들의 인터뷰를 인용하면서 “‘지하디스트’들의 오슬로 공격은 미국이 국방 예산을 줄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쓰기도 했다.
그러나 브루커 씨는 “그 순간 트위터에서는 범인이 금발의 남성이고, 노르웨이어를 구사했다는 목격자들의 증언이 전해지고 있었다”면서 “그럼에도 전문가들은 ‘알카에다가 현지인 테러리스트를 고용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 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지적했다. 언론들은 여전히 무슬림을 범인의 배후로 지목한 셈이다.
또 그는 사건 조사가 진행되면서 범인이 백인의 극우 민족주의자이자 기독교 근본주의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섣불리 판단하기 전에 모든 증거들이 밝혀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전문가들이 경계하고 나섰다고 전했다. 다시 말해 “무슬림의 소행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일단 무슬림의 소행인 것으로 간주하라”는 게 소위 ‘전문가’들의 태도였다는 것이다.
![]() |
||
▲ 조선일보 7월 23일자 14면. | ||
우리 언론도 사건 초기에 이러한 ‘전문가’들의 추측을 그대로 인용해 무슬림을 범인으로 지목하는 데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조선일보는 23일자 신문에 실린 <알카에다, 아프가니스탄 참전국 보복 가능성>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일각에서는 알카에다 같은 이슬람 무장단체와 연계된 테러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면서 “특히 지난주 노르웨이 검찰은 ‘나를 추방하면 특정 정치인을 살해하겠다’고 협박한 이라크 태생 성직자 물라 크레카를 테러 혐의로 기소했다”는 분석도 내놨다.
이 신문은 또 “앞서 작년 12월 인근 국가인 스웨덴 도심에서 차량 폭탄테러가 발생했다. 당시 테러는 알카에다와 연계된 이슬람 무장단체가 스웨덴이 아프가니스탄전에 기여한 국가들에 대해 보복하려는 목적에서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거나 “덴마크 한 신문사는 2005년 이슬람 창시자 마호메트를 희화화한 만평을 게재해 이슬람권의 반발을 샀다”고 그 ‘배경’을 추측하기도 했다.
중앙일보도 같은 날 “정확한 사고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현지 언론은 국제 테러조직 알카에다의 테러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고 보도하면서 역시 서방 ‘전문가’들의 분석을 비슷하게 전했다. 한국일보도 23일자 신문에서 “노르웨이는 아프가니스탄에 500명의 병력을 파견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알카에다는 노르웨이에 대한 테러를 경고한 적이 있다”면서 “만약 이번 테러가 알카에다의 소행으로 밝혀진다면 미군이 5월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한 이후 서방에 가한 첫 공격이 되는 셈”이라고 보도했다.
![]() |
||
▲ 중앙일보 7월 23일 12면. | ||
![]() |
||
▲ 한국일보 7월 23일자 10면. | ||
![]() |
||
▲ 한겨레 7월 23일자 10면. | ||
한겨레도 23일자 지면에서 “이날 폭발 사고는 노르웨이 당국이 알카에다와 연관된 자생적 테러 음모사건을 수사하는 시점에 일어났다”면서 “이웃나라 덴마크에서는 한 현지 신문이 지난 2005년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를 풍자하는 만평을 그려, 이슬람권의 강력한 혐의를 받으며 테러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고 비슷한 ‘배경 설명’을 내놨다. 경향은 “누구에 의한 것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면서도 “노르웨이 당국은 지난해 7월 알카에다 조직원 3명을 미국과 영국 등에 대한 동시다발 폭탄테러를 계획한 혐의로 긴급체포한 바 있다”고 전했다.
이같은 언론들의 ‘오보’에 대해 브루커 씨는 “아장아장 걷는 아이가 헬리콥터의 작동방식에 대해 가설을 세우는 꼴”이라면서 “(이같은) 어림짐작은 우리를 안전하게 해주지 못할 것”이라고 거듭 비판했다.
한국 언론도 서양 언론에 등장한 ‘전문가’의 말만 믿고 섣부르게 무슬림을 자연스레 테러리스트와 등치시킨 과실은 없었는지 반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트위터에서 @sabal72를 아이디로 쓰는 한 사용자는 “노르웨이 테러가 만약 이슬람 테러조직에 의해서 일어났다면 아마 서방의 각종 언론들과 서방의 이런 시각을 따라쓰기에 급급한 우리 언론들은 이슬람의 위험성이 어쩌고 하면서 거품을 물었겠지”라고 꼬집었고, 또다른 사용자(@jonghwan)는 “처음 노르웨이 사건을 보도하던 미국 언론들은 누구 할것없이 terror라고 하더니 지금은 killing 이나 massacre를 쓰는구나. 이봐. 테러는 이슬람만 하는게 아니라고”라며 쓴소리를 던졌다.